
[奉局长]的三分钱专栏时间!局长的文笔水准或许不值[三分钱]...但还是解开主日话语后采用世上的语言撰写成专文啰。
"나는 상산(常山)의 조자룡이다"
삼국지를 읽다 보면 가슴이 웅장해지는 장면이 많습니다. 도원의 결의가 그렇고, 적벽의 불길이 그렇고, 제갈량의 출사표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멋진 한 장면을 꼽으라면 필자는 주저 없이 이 장면을 꼽겠습니다.
전장에서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명장이 말 위에 올라 긴 창을 휘두르며 "나는 상산의 조자룡이다!" 하고 외치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수만 대군이 겹겹이 에워싼 적진 한가운데에서, 그것도 혼자서, 자기 이름을 당당히 밝힌다는 것은 보통 배짱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그 외침 안에는 수많은 전투에서 쌓아 온 실력과, 그 실력에서 나오는 흔들림 없는 자기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사람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프로페시오(professio)'입니다.
라틴어 프로페시오는 '앞에(pro)'와 '말하다(fateri)'가 합쳐진 말로, 사람들 앞에 나서서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선언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중세 수도사들이 하나님께 평생을 드리겠다고 공적으로 서원하는 것을 바로 이 말로 불렀고, 바로 여기서 전문 직업을 뜻하는 '프로페션(profession)'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프로(professional)'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 진짜 프로란 실력을 갖추고, 그 실력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당당히 선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무패의 조자룡임을 선포하는 순간, 적진은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주눅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한마디는 어떤 무기보다 먼저 적의 기세를 꺾고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가장 강력한 미리 울리는 승전의 북소리와 같았을 것입니다.
싸움은 칼이 부딪히기 전에, 선포의 순간에 이미 절반은 끝난 셈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상 가장 심장 떨리는 프로페시오는 무엇이었을까요?
필자는 2천 년 전 사마리아 한 우물가에서 예수님께서 한 여인에게 하신 선포, "내가 그로라"(요한복음 4:26) 라고 믿습니다.
그 여인은 사람들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동네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서늘한 아침과 저녁을 피해, 해가 가장 뜨거운 한낮에야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도둑질하듯 얼른 물을 길어 가던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한 유대인 남자가 그녀의 지난 인생을 모두 꿰뚫어 말씀하시고는 마침내 당신이 누구인지를 선포하셨습니다. 그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 그리스도가 바로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라고 말입니다.
이 한마디의 프로페시오가 여인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한복음 4:29).
사람을 피해 다니던 여인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사도' 같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 여인도 분명 동네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저 부정한 여편네가 이제는 미치기까지 했네." 그런 비웃음과 손가락질이 돌아올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용기 있게 외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자신의 일생을 관통하며 괴롭혀 온 모든 문제를 단번에 풀어 주시고, "내가 그로라" 강력하게 선언하신 구원주의 프로페시오가 그녀 안에 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성경은 그 동네 중에 여러 사마리아인이 그 여자의 말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었다고 기록합니다(요한복음 4:39).
한 사람이 받은 선포가 또 다른 선포가 되어, 마을을, 세계를 움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의 원형입니다.
'인터넷 선교'라는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은 결국 '설득'입니다.
화면 너머의 한 사람이 시대 말씀으로 마음을 열도록 돕는 일, 그것이 우리가 온라인에서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고 댓글을 다는 이유입니다.
익히 알고 있듯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3요소로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를 꼽았습니다.
로고스는 논리와 근거, 파토스는 듣는 이의 감정에 닿는 공감, 그리고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신뢰를 말합니다.
설득을 위해서는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적 접근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셋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 에토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화자의 성품이 설득에서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보았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이 말을 누가 하느냐, 곧 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무게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홍삼이 건강에 좋다'는 말을 금산 군민 100명이 하는 것보다, 국립대학교 관련 학과 교수 한 사람이 했을 때 더 설득력이 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금산 군민들이 거짓을 말해서가 아닙니다. 듣는 사람은 말의 내용보다 먼저 말하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이 분야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지를 무의식중에 따지기 때문입니다.
조자룡의 외침이 적진을 떨게 한 것도 그 목소리가 커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 뒤에 무패의 전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외침이 마을을 움직인 것도 그녀가 말을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알던 그녀의 삶이 눈앞에서 바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화자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터넷 선교의 성공 요소 역시 화자인 내가 '프로'인가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인터넷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글과 영상이 쏟아집니다. 수많은 목소리 가운데 사람들이 멈추어 귀를 기울이는 것은 결국 신뢰할 만한 화자의 목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인터넷 선교의 프로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필자는 세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조자룡이 자신의 이름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먼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만난 주는 어떤 분인지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내 인생의 문제를 풀어 주신 그분을 직접 만난 경험이 없다면, 우리의 말은 남의 이야기를 옮기는 소문에 그칠 뿐입니다.
둘째,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실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의사는 의사의 자리에서, 교사는 교사의 자리에서, 엔지니어와 영업인과 주부는 각자의 자리에서 전문가가 될 때 그 사람의 말에 무게가 실립니다.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 고백은 홍삼을 이야기하는 교수의 말처럼 힘을 얻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디모데후서 2:15)이 되라고 권면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셋째,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삶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에토스는 한 편의 글이 아니라 꾸준히 쌓인 삶의 흔적으로 만들어집니다. 화면 속의 나와 화면 밖의 내가 같은 사람일 때, 그리고 그 일관됨이 시간 속에서 증명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우리의 말을 믿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는 각자의 우물가에 서 있습니다. 누군가는 블로그에서, 누군가는 유튜브에서, 누군가는 SNS에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외쳐야 할 것은 대단한 웅변이 아닙니다. 나를 만나 주신 그분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을 만난 내가 누구인지를 당당히 밝히는 것입니다.
"나는 상산의 조자룡이다!" 그 외침이 적진을 흔들었듯이, 새 시대 역사, 하나님의 뜻 안에서 프로가 된 우리의 '프로페시오'가 오늘 인터넷이라는 광야에서 승전의 북소리처럼 울려 퍼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