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分钱专栏 by 봉국장

[奉局长]的三分钱专栏时间!局长的文笔水准或许不值[三分钱]...但还是解开主日话语后采用世上的语言撰写成专文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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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지 않은 '몰입' 인생

'심심해 죽겠어'

집에서 아이들이 자주 하는 말들 중 하나입니다.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라...?' 

'심심함'을 회피하려는 것은 어쩌면 매우 중요한 인간의 본능인지 모르겠습니다.


천재로 불리웠던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은 인간의 불행은 바로 이 '심심함'을 참지 못 하는 것에서 비롯 된다고 했습니다.


예를들어 도박에 심하게 중독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이 어느 날 도박을 통해 꿈에 그리던 일확천금을 얻었다 해도, 또 아예 누군가가 그에게 매일 일정한 '돈'을 줄테니 도박을 끊으라 해도 끊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상 '돈' 보다 '심심함을 회피(돈을 잃고 따는 그 '극적인 상황에 몰입', 일확천금을 향한 '몰입')'하려는 목적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심심함을 못 견뎌하여 도박 중독이라는 불행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피비린내 나는 혁명도, 수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는 전쟁도 어떤 대의 명분 성취나 실익 획득 보다 '심심함'을 회피하려는 본능에서 기인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심심함 이론(?)'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따지기 앞서 바로 '공감'부터 되고 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심심함'에 대한 문제해결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심심함'의 반대말로 '몰입'이 가장 적당할거라 생각 합니다.

어딘가에,무슨 일에든 '몰입(Flow 혹은 Immersion)'을 하고 있을 때 '심심함'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몰입의 종류를 한 번 정리해봅니다.

1차 몰입은 생존을 위해 대안 없는 몰입, 먹고 살기 위해 심심함 자체가 사치인 그런 몰입입니다.

2차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 되었을 때에는 '재미'를 추구하는 몰입 (취미, 레져활동 등)

3차 대의명분이 뒷받침 되는 몰입 (독립운동이나 민주항쟁 등)


1차 몰입은 참으로 서글픈 몰입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상황은 벗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2차 몰입은 심심함을 회피하기 위해 당구를 치거나 골프를 치는 경우일텐데 

곰곰히 따져 보면 당구는 색깔에 맞춰 구슬치기이고, 골프는 구멍에 공을 작대기로 몇 번만에 쳐서 집어 넣느냐 하는 몰입이라 '이게 뭐하는 짓인가'할 만한 '허무한' 몰입입니다.

몰입을 하고는 있는데 뭔가 '가짜'에 몰입하고 있는 것 같은 공허함을 느낄 수 있을 그런 몰입입니다.


3차 몰입은 꽤 의미 있어 보입니다. 대의명분을 위해 몰입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면서 동시에 부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도 추호의 흔들림이 없었던 유관순 열사나 안중근 의사와 같은 그런 몰입.


'밀정'(감독 김지운)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가난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의열단원들이 너무 잘 차려 입고, 멋진 모습으로만 나와서 현실적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 뒤 우연히 알게 된 사실, 실제 의열단원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매일매일 자신의 최고 멋진 모습을 유지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무엇을 먹게 되었든지 생애 마지막 밥일지도 모를 밥에 감사의 기도가 깊었을 것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는 말 한마디도 유언이 될 지 모를 그런 깊은 울림이 묻어 났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궁극의 삶(정명석 목사께서 극까지, 끝까지 다 하는 삶이라 표현하셨던)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3차 몰입도 한계가 있습니다.

몰입하는 대의명분 자체가 잘 못 된 경우가 있습니다. 

근대 독일의 나치즘이나 최근의 I.S(이슬람 국가) 활동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또 대의명분이 좋더라도 그 자체가 사라지게 되면 또 다시 '심심함'과 싸워야 할 상황이 생깁니다.

실제 러시아 혁명 당시 한 혁명가는 혁명이 완성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 혁명이 끝난 뒤 우리의 일상을 또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를 걱정했다고 합니다.


결국 1~3차의 몰입 모두 인류의 심심함을 해결하는 데 있어 제한 된 솔루션이라는 것인데, 

다시 파스칼의 말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 봅니다.

파스칼은 몰입의 궁극을 바로 '신(神)의 세계를 향한 몰입'으로 정의했다고 합니다.

 

이를 '4차 몰입'으로 명명해 본다면 이 4차 몰입은 신을 향해 기도하고, 신의 뜻(세계)를 이루려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영원한 세계(가치)'와 관련 된 몰입이니 앞의 3차 몰입의 한계를 모두 벗어나는 경지가 될 수 있습니다.


금주 말씀 통해서 정명석 목사께서는 '끌까지 신을 향해 기도하고,주를 머리 삼아 끝까지 실천'하면 모든 꿈은 이루질것이라 하셨습니다. 4차 몰입에 관련 된 말씀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도저히 심심할 틈이 없는 위대한 하늘 역사에 몸 담고 가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를 확실히 알고 있다면 우리의 실천은 끝까지, 극까지 가는 몰입의 경지를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강의가 이뤄지고 있는 세미나실에서 가장 강의에 몰입하고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열열한 청자(聽者)보다 화자(話者, 강사)일 확률이 훨씬 높을 것입니다. 

어떤 일에 '몰입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일을 '실천'하는 핵심,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몰입'하기 딱 좋은 새 해(2017 실천의 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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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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