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局长]的三分钱专栏时间!局长的文笔水准或许不值[三分钱]...但还是解开主日话语后采用世上的语言撰写成专文啰。
'사람이 이렇게 죽을 수 있겠구나...'
최근 바닷가를 가게 되었을 때 수영할 생각이 전혀 없이 갔다가 잠시 짙푸른 ‘아드리안’의 감성에 빠져 그만 바다에 몸 담가 보겠다고 뛰어들었다가 순간 역류에 휩쓸리면서 죽을 뻔했습니다.
수영을 못 하지 않고, 방파제와 거리가 손 뻗으면 닿을 1m 남짓한 바다에서 크게 바닷물을 두어 번 들이켜 당황하여 의식을 잃을 뻔했으니 정말 ‘우습게’ 죽을 뻔 한 것입니다.
누군가 내민 손을 잡아 뭍에 오르던 그 순간 하늘 앞에 감사드리는데 동시에 드는 생각이 정말 ‘죽음’이란 것이 구중심산(九重深山), 머나 먼 요단강 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지장 한 장 새를 두고 ‘삶’과 같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살아 있음을 '감사'하고 죽음을 기억하며(Memento Mori) '겸손'해야 하는 것이 삶을 대하는 ‘기본’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 ‘기본’을 바탕으로 정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결론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젊어 ‘어떻게 살 것인가?’에 고민이 깊었다면 나이 들어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생사일여(生死一如)가 이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소크라테스와 점심 한 끼를 할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포기할 수 있다.”
“아! (소크라)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21세기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도, 가왕(歌王) 나훈아 가수도…
아니 결국 모든 인생들이 살면서,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알고 싶은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며 그것을 알려주는 ‘소크라테스’, 참 ‘선생’을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창조론의 관점에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힌트에서 해답을 찾고자 하는 이 문제는 사실 오직 인생을 창조한 자,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난제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가서 가르쳐 주마’ 성경은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 약속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책이 된 성경의 오랜 약속에서는 창조주 ‘여호와’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새로운 약속을 통해 ‘예수’께서 그리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오신다’는 약속의 실현 방안입니다.
어떻게 오실지를 알아야 제대로 알아보고 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늘서 내려온다’ 와 ‘땅에서 태어난다’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불과 칼에 옹위되어 구름 타고 내려오심”
‘여자가 잉태하여 그의 아들로 태어날 것.’
전혀 달라 보이는 ‘강림’의 두 방식을 두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매우 혼란스러워 했고 지금도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선교회의 차별화된 말씀은 이 혼란을 깨끗하게 해결했습니다.
하늘로부터의 강림은 보이지 않는 다른 실체 ‘영(Spirit)’에 관한 것이며, 땅에서의 탄생은 ‘육(Flesh)에 관한 것으로 시대 택한 자의 ‘육신’에 하늘의 ‘영’이 임하는 것이란 분명한 말씀으로 상이 해 보이는 이 ‘두’ 강림의 형식은 모순 없이 명백하게 ‘하나’가 됩니다.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이를 가르쳐 줄 참 ‘선생’ 그의 출현을 제대로 알고 기다리다 맞는 것.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 없는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