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잼 칼럼 by 갓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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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이유

후배 회원 하나가 내게 “저는 답을 얻고 싶은데 요즘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 와닿지 않아요.”라고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참 바람직하다고 격려도 하고 싶어 “그래? 어떤 답을 얻고 싶은데?”라고 궁금해하니

“그냥 이런 저런요.”란 반응이었다.

후배가 내게서 꼭 해결책을 얻으리라는 기대를 안 했던 것인지 이 대화는 그냥 그렇게 끝났다.



싱거운 대화려니 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계속 생각이 났다.

‘그럼 나는 요즘 말씀이 마음에 와닿나?’ 진심으로 생각해 보니 아닌 거 같았다.

분명 나도 매주, 매일 말씀을 통해 내 인생에 답을 찾는다는 마음가짐인데도

솔직히 ‘말씀 자체가 마음에 와닿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자신할 수가 없다고 인정하게 됐다.


왜일까? 2025년 2월 9일 <육과 혼과 영>이라는 주제의 수요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탁 걸렸던 부분이 생각나 부리나케 컴퓨터에서 해당 문서파일을 열어보았다.



가치를 모르면 하나님이 축복을 주지 않으신다.

선생, 산에서 그리 몸부림쳐 시대 말씀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른다.

따라오다가 실패한 자들은 ‘그 말씀이 그 말씀’이라고 한 자들이다.


선생이 직접 말씀 전하는 것이 크지만,

지금 글로 써서 전하는 이 말씀도 크다.

말씀을 전할 때, 큰 능력과 권세가 나간다.



그냥 보통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선영계(善靈界)에 간다.

그렇게 해서는 천국 가지 못한다.


특히 “지금 글로 써서 전하는 이 말씀도 크다.”라고 하신 부분을 두고 생각이 깊어졌다.

왜 말씀이 마음에 확 와닿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과거의 신앙생활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과거 얘기를 하면 또 ‘라떼’니 ‘틀딱’이니 하는 말을 들을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얘기를 좀 하면서 나의 상태를 고백하고자 한다.



예전에 선생님이 설교하실 때 종종 하시던 말이 “고개 좀 들어라.”였다.

모두들 한 자라도 놓칠세라 속기라도 하듯 받아적느라 머리를 처박고 노트에 집중했었기 때문이었다.

책망은 아니었으나 심지어 “이건 안 적어도 돼.”라고까지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리곤 예배 후 교회를 나서면서 또 각 모임을 하면서

“오늘 나에 대해서 말씀하셨어. 답을 받았어.”라며 설교 말씀에서 느낀 것, 즉 깨달음을 약간은 으스대면서 나누곤 했고,

그러면 다른 이들은 “어? 그런 말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것 말고 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라며

자기 깨달음이 더 크다는 듯 보기 좋고 듣기 좋은 배틀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다 맞는 얘기였고, 어떤 의미에서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실체 계시를 받은 것이었다.

게다가 다음 예배가 있기 전까지 자신이 적은 주일 말씀에 요일마다 색깔을 달리하여 밑줄도 긋고 나름 또 깨달은 것들을 깨알같이 적기도 하고,

그렇게 각자 매주 답을 받는 어떤 틀이 갖춰졌었다.

그러다 예배에 부득이 참석하지 못한 이에게 자신의 노트를 복사하여 주기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받은 자는 그걸 무지 소중하게 여기고 고마워했다.


지금은 어떤가? 일부러 노력하지 않는 이상 빠짐없이 말씀 받아적겠다고 손목 워밍업을 하지 않아도

SNS로 꼬박꼬박 파일이 배송되니 말씀을 한 자도 빠짐없이 받아본다는 혜택은 있으나

오히려 집중도는 떨어진 게 사실이다(강조컨대 나의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배 후 들은 말씀을 되새겨보려 해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는데?’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부지기수다.

‘다시 깨달아야겠는데’도 아니고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는데’인 거였다.

그런데 말씀은 매일 매일 워낙 많이 쏟아지니까 닥치는 것들만 읽는 것에도 허덕이고,

그래서 다시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게 되는 반복이 계속된다.



마음은 인생의 답을, 내 생활의 답을 찾겠다고 하지만 실상 무슨 ‘답’을 얻겠다는 것인지

나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깊은 고뇌가 미흡한 상태에서 뭔가 명백한 어려움이 닥쳐 고민이 될 때만 매달리는 신앙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혹은 하도 복잡해진 현실에 함께 복잡해진 나의 문제에 얽매여 뇌를 비우지 못한 채

그나마 필기하지도 않으면서 무의식적으로 나의 방식으로 정해놓고 기대하는 답을 얻으려고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선생님이 “말씀 따로, 생각 따로, 생활 따로, ‘따로국밥’ 신앙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 건데...


계속 이렇게 생활이 흘러가면 그냥 교회 가는 자체로 답인 듯 매너리즘에 빠지는 형식 신앙이 되는 것이고,

기성의 기복신앙과 다를 바 없게 되는 거구나,라고 깨달았다.

나의 평소 신앙적 고민과 연구가 있어야 그에 따라 당연히 생기는 문제(플러그)를 말씀(콘센트)에 꽂으면 바로 답이 나오는데

플러그는 준비하지도 않고 콘센트만 바라본다거나,

말씀과 방향이 다른 자기 방식의 110V용 문제 플러그를 가져다 220V용 말씀 콘센트에 꽂으려 하니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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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선생님이 주시는 말씀을 모두 선생님처럼 직접 써보는 때가 있었다.

월요일부터는 차분히 쓰다가도 점점 손가락도 손목도 쑤셔올 정도로 양이 많은 것을 느끼면서

어느새 말씀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고사하고 마구 휘갈겨 쓰며 해내는 것에만 매달린 적이 있었다.

나는 그랬다. 정말 미치게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어마어마한 양의 말씀을 써주시는 선생님의 그 고통과 생명 사랑의 심정에 뼈저리게 감정이입하고 정말로 감사하며 한 자 한 자 소중히 여기면서 나의 답을 완벽히 찾아 행해야 한다.


후배가 나한테서 해결책을 얻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 아니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 확실히 맞았나 보다.

후배 덕분에 온전한 ‘플러그’를 쥐고 있지 못했던 내가 오히려 큰 깨달음을 얻게 되어 그에게도 고맙다.

이 깨달음을 꼭 나눠주리라 마음먹으며, ‘글로 써서 전하는 말씀이 크고도 큼’을 새삼 감격하고 감사하게 된다.


[By Wo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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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