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局长]的三分钱专栏时间!局长的文笔水准或许不值[三分钱]...但还是解开主日话语后采用世上的语言撰写成专文啰。
누구라도 인간적으로 신속하게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들 중 하나는 ‘고통으로 야간에 응급실을 향해 갈 때’ 입니다.
이 때는 본인이 아프든 그 가족이 아프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명(生命)에 대한 경외(敬畏)’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의 ‘미지(未知)’에서 나오는 것인가 봅니다.
바로 어제 저는 급성 복통을 호소하는 둘째를 데리고 응급실을 향해 늦은 밤, 차를 달려야 했습니다.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겠지만 ‘별 일 있겠어?’ 내색은 않더라도 내심 별별 걱정이 다 되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몇 가지 검사를 하고 수액제와 함께 진통제 투입을 하는 중 ‘어지럼 증상에 복통이 더 심해진다’ 눈물까지 떨구는 녀석을 보고서는 당직의가 서둘러 진통제 투여를 중단하고 혈압도 다시 재는 등 잠시 소란스러워집니다. 잠시 뒤 소동은 가라 앉고 반시간쯤 지났을까?
검사 결과 큰 이상은 없고 ‘위염’인 듯하다면서, 차츰 복통도 줄어 드는 것을 확인하고는 (특히)‘P’성분이 든 ‘진통제’에 알러지 (allergy)가 있으니 이 후 주의해야 된다는 말과 함께 3일 치 약을 받고 귀가하라 합니다.
어릴 때 아토피로 고생한 녀석은 ‘진통제 알러지’ 얘기까지 듣고는 ‘아픈데 진통제도 편히 못 쓰나’ 한탄을 하는 듯합니다.
역시 위가 좋지 않은 '아비'로서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입 밖으로는 전혀 생각지 않던 말이 나옵니다.
"진통제 알레르기로 인해 오히려 넌 평생 건강하게 잘 살거다. 아파도 진통제를 편히 못 쓴다는 생각에 평소 자기건강 관리를 더 하게 될 것이니까...."
당당한 변명 같기도 하고, 어슬픈 위로 같기도 한 이 말이 나오면서 동시에 ‘약한 것을 들어 강자를 무색케 하고 미련한 자를 들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만드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 올랐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완벽하여 영생을 하도록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물질로 창조 되었으니 물리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실제 창조목적 또한 육이 영생해야 이뤄질 수 있는 그런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우리 육신의 ‘생명’은 제 안에서도 강하고 약한 것이 따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단지 주어진 기한 내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니 육신 외 어떤 동물도 갖지 못한 ‘지혜’를 인간에게는 더 해 주심으로 약한 것에도 좌절 않고 잘 관리하여 강하게 만들 수 있게, 또 강함에서도 겸손하여 과하지 않게 절제하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위대한 창조주의 전지전능이 인간 육신을 약점이나 약함이 없는 불사(不死)의 완벽한 몸으로 만든 것 보다 더욱 돋보이게 드러나는 대목이 됩니다.
강하고 약함이 있는 제한된 육(肉), 하지만 그 위에 더 하신 무한한 ‘지혜’의 힘을 통해 궁극적으로 ‘영원함’에 이를 수 있게 하심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생명(生命)’은 ‘생(生)에 대한 명(命)령’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살아가라 명령’ 하심입니다.
‘명령’은 단어 자체로 이미 화자(話者)와 청자(聽者)간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고, 또 그 자체로 뚜렷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생명(生命)!!’은 하나님께서 '창조'(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하시고, 그 살아가야 하는 '목적'(창조목적)을 제시하셨음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웅변으로 알려 주는 ‘단어’, ‘말씀’ 그 자체인지 모릅니다.
마침 정명석 목사께서 금주 말씀을 통해 우리네 ‘생명’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신의 가장 고유한 일이심을 밝히시며, 우리끼리도 ‘생명’을 두고 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큰 '부탁'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온 인류, 생명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으시는 목사님께서 깨달으시고 전해주시는 정확한 말씀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가장 고유한 하나님의 영역, 그것은 나의 생명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술(前述)과 같이 이 ‘생명’에 있어 ‘약함과 강함’ 사이의 패러독스(Paradox)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듯합니다.
약하고 미련한 것을 들어 ‘강하고 지혜롭다’ 하는 것들을 부끄럽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시대마다 보내신 ‘중심인물’을 통해 이뤄졌는데, 하나님께서 보낸 자 중 가장 위대한 ‘예수’는 오히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심지어 말구유에서 그 ‘생(生)의 명령(命令)’을 받들기 시작하신 지경이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生命)에 대한 경외(敬畏)’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의 ‘미지(未知)’에서 나오는 것인가 했더니 제대로 알고 보면 더욱 경외로운 것이었다고 고백 해 봅니다.
어디서도 들어 보지 못 했던 ‘생명’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서 이 시대에도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가장 생명을 위한 기도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이 불현듯 떠 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