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局长]的三分钱专栏时间!局长的文笔水准或许不值[三分钱]...但还是解开主日话语后采用世上的语言撰写成专文啰。
'세 푼''짜리 글쓰기를 멈춘 지 꽤 오랜 기간이 흘렀습니다.
더 이상 미천한 글을 쓰는 것이 의미가 없다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지인이 선물해 준 ‘5년 후 나에게’’라는 다이어리.
책에서 제시하는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을 5년에 걸쳐 써 내려가는 그런 다이어리입니다.
무심코 책을 펼쳐보니 첫 질문이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입니다.
아무것도 쓰지 않겠다 멈추었던 손이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듯 무심하게 펜을 들어 답을 합니다.
“내 삶의 목적은 뚜렷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요즘에 나는... 과연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펜을 놓고 보니 ‘얼마만에 글을 쓴 건가’ 스스로 생경 해졌습니다.
과연 나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잘 살아 왔던 것일까?
또 뚜렷한 목적을 향해 똑바로 살아 갈 수 있을 것인가?
사추기인지 갱년기인지 흔한 시쳇말 한 마디로 정의하고 싶지 않은 속으로 앓고 있던 이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올 신년벽두에 제 스스로 세운 목표는 ‘새롭게 되기’ 였습니다.
온라인 강연을 통해 ‘새롭게 되기’에 대한 방법론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되기’는 편안하게 담화 나누면서 이해하면 이뤄지는 그런 것이 아닌, 사실상 무시무시한 말씀입니다.
왼쪽으로 돌던 팽이가 새롭게 오른쪽으로 돌려면 멈춰야 합니다. 돌던 팽이의 ‘멈춤’은 곧 ‘쓰러짐’입니다.
알에서 살다가 병아리로 새롭게 되려면 자기를 지켜 주던 안락한 보금자리를 스스로 깨부수고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되기’는 ‘멈춤(쓰러짐)’과 ‘파괴’를 전제로 합니다.
구약성서 욥(Job)의 인내는 이 ‘멈춤’과 ‘파괴’의 기간을 버텨 내는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각종 재산상의 손실과 심지어 자녀들의 희생까지...
욥은 온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그리고 여태 그가 지켜왔던 모든 것이 파괴된 듯한 공포와 고통을 분명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나 뵈올 수 없구나”
인내의 대명사 욥에게도 ‘멈춤과 파괴’가 주는 공포와 고통은 견디기 무척이나 힘든 그런 것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 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욥은 갑자기 당한 멈춤과 파괴의 때에 순금처럼 ‘새롭게 될 자신’, 당장에는 알 수 없지만 곧 하나님께서 펼치 실 '새로운 역사'에 대한 비전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뒤 좌우 그 어디를 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내가 가는 길을 아시고 정녕코 그 뜻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이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심장을 뜨겁게 데우기 충분합니다.
감히 욥에 비할 바 아니지만 최근 제게도 틀림없이 ‘멈춤’과 ‘파괴’의 시간이 찾아왔고 지금도 그 어디쯤 인가를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때 성삼위 도우심은 인내할 수 있는 힘과 믿음을 주시는 것이라는 정명석 목사님 말씀은 가장 큰 위로를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파괴 된 듯한 폐허더미 위에서 멈춰 쓰러져 앞도 뒤도 좌우도 보이지 않지만, ‘삼위께서 내 가는 길을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을 정녕코 이루시리라” 고백하는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부디 내게도 ‘이런 일이 많이’ 있기를, 이 기회를 통해 '새롭게 되기'를 기도해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