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_특집간증

우리는 사람보다 결론을 먼저 만납니다

지난달 우리 교회에서는 매일 새벽기도 시간마다 한 명씩 나와 짧게 자신이 전도된 사연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다양한 전도의 아이디어를 얻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배움도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섭리를 만나게 된 과정은 저마다 달랐고, 그 다양함만으로도 충분히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제 마음에 남은 것은 전도 방법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함께 예배 드리고, 이름도 알고, 마주치면 인사도 나누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고 지낸 사람이 아니라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람이 달라진 건가 싶었는데 더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바라보는 제 시선이었습니다. 그제야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 알고 있다는 착각

곰곰이 돌아보니 우리는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람보다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이미 내려놓은 결론’을 더 많이 만나며 살아갑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우리는 사람보다 먼저 그 사람을 설명하는 문장을 하나 갖게 됩니다.

“저 사람은 원래 저래.”

“저 사람은 믿음이 좋아.”

“저 사람은 늘 부정적이야.”

그리고 그 문장은 처음에는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인 것처럼 붙지만 어느새 그 사람을 대신하는 결론이 됩니다. 하지만 새벽기도에서의 개인 이야기는 그런 결론을 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정말로 잘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고, 또 의도적으로 세운 결론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오래 함께 있어도 낯설 때가 있고, 자주 만나도 서로를 잘 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의 이미지와 역할에 먼저 익숙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몇 분 남짓한 이야기 속에는 제가 몰랐던 그 사람만의 기다림이 있었고, 상처가 있었고, 기도가 있었고, 하나님께 매달렸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습 너머로 비로소 한 사람이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사람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너무 일찍 다 안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형제 사랑이 어려웠던 이유


그러다 보니 정명석 목사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형제 사랑이 떠올랐습니다.



이 시대는 사랑 시대라 사랑이 죽으면 끝난 것이다. 불신, 배신, 등진 자들이다. 지금은 사랑이 핵인 시대다. 특별히 형제 사랑해 주고, 위해 주고, 섬겨 줘라. 원수까지도 위해 주고 사랑하고 섬겨 주어라. 그렇다고 해서 너희에게 손해 안 간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

선생이 베트남에서도 적들에게 해를 준 적이 없다. 내게는 적이지만 하나님께는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 2026년 5월 29일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 합니다. 하지만 마음 한 편은 솔직히 늘 막막합니다. 형제 사랑은 너무 큰 결단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자꾸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못 간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 새벽기도를 지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형제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사랑이 너무 큰 명령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이미 내려놓은 결론 속에서 사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번 결론을 내리면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결론은 질문을 멈추게 합니다. 질문이 멈추면 새로운 이야기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결론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사람을 이해하게 하는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못 보게 하는 벽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만들어 놓은 그 사람의 모습을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됩니다. 형제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미움만이 아니라, 어쩌면 '나는 저 사람을 잘 안다.'는 익숙한 확신, 즉 우리 뇌가 가진 인지적 조급함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말씀은 이미 그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정명석 목사님께서는 이미 같은 원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형제나 아들딸이나 부모나 옆에 있는 자와 한집에 같이 살아도 서로 생각 안 하고 말도 안 하면 뇌에서 잊으니 없는 것 같습니다. 눈으로 보아도 생각해야 있음을 느끼고, 말해야 서로 통하여서 있음을 뇌가 인지하여 마음, 생각에서 확신합니다.

— 2026년 1월 21일 <행함이 없는 자는 죽은 자다> 주제 수요말씀 중


그때는 이 말씀이 단순히 대화를 많이 하라는 뜻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이 말씀은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생각해야 있음을 느낀다.”

저는 이 문장이 오래 남습니다. 사람은 곁에 있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향할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뜻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잊히고, 잊히면 익숙한 얼굴만 남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속에서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납니다.

새벽기도에서 제가 만난 것은 새로운 사람이 아니라 이제야 만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 사람을 다시 만난다는 것과 간섭은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새롭게 만난다는 말이 곧 사람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심을 사람의 사생활까지 파고드는 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관심에도 경계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관심과 간섭을 혼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누가 무엇을 한다더라, 어떤 사정이 있다더라, 누구와 가깝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부지런히 모으고 전하는 것을 관심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신과는 관계없는 개인의 배경까지 알려고 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이야기거리로 소비하는 일입니다. 누군가 조용히 지내기를 원한다면 그것 역시 존중해야 합니다. 신앙과 무관한 개인의 형편까지 캐묻거나, 본인의 허락 없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옮기는 것은 형제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마음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자리까지 우리가 대신 들어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 사랑에도 순서는 있습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오해가 있습니다. 사람을 새롭게 바라보라는 말이 모든 문제를 덮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도 "형제 사랑을 해야 하지 않느냐."며 상대의 사랑만 기대하는 것은 말씀의 순서를 거꾸로 세우는 일입니다.

사랑은 책임을 없애는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 회개가 있어야 하고, 먼저 돌이킴이 있어야 합니다. 그 위에 용서가 있고, 그 위에 형제 사랑이 있습니다. 순서가 바뀌면 우리 자신의 책임을 덮는 편리한 명분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 사람은 끝없이 다시 만나는 존재입니다

요한1서는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 요한1서 4장 20~21절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여기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야에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 어제의 결론으로 오늘의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번 새벽기도는 전도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또 하나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선 몇 사람뿐 아니라,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형제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려 애쓰는 일보다 먼저, 사람에 대한 내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한 번 알았다고 끝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 역시 서로를 어제의 결론이 아니라 오늘의 사람으로 다시 만나야 하는 존재일 것입니다.


- Ned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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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