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석 목사_나만이 걸어온길

생명의 존엄성을 깊이 깨닫던 어느 날

정명석 목사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무도 없는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만 말없이 떠갔다. 푸른 하늘 흰 구름조차도 모두 낯설고 물 설은 이국땅이었다. 열대의 작열(灼熱)하는 태양 역시 이곳이 이국 땅 월남(베트남)임을 부인할 수가 없게 했다.


곳곳에 폭음 소리가 들려오고 귀청이 찢어질 듯 들리는 소총 소리에 마음은 섬뜩하고 머리털은 하늘로 올라갈 듯 곤두섰다. 나는 적을 노리고 적은 나를 노리는 긴장과 심정 애태우는 전선의 낯선 월남 땅 나트랑에 정명석 목사는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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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월남 파월 20일이 다 되어갔다. 정명석 목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자신의 생명을 두고 생각이 깊었다. 자기 생명이라 해도 참 자신이 없었다. 누구는 호언장담으로 “또다시 돌아가마, 고향 하늘아!”하며 그저 가벼이 말했지만, 앞날의 상황이 훤히 보이는 입장에서 정명석 목사는 자신이 없었다. 그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부귀영화도 좋지만 그런 것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정말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오직 생명만이라도 살아서 고국에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기도 중, 옆 전우들의 이야기들이 귀에 들려왔다. “고국에 돌아갈 때 컬러 TV도 사고, 녹음기도 사고, 냉장고도 사서 돌아가야지.” “난 월남 아가씨나 하나 데리고 돌아가야겠다.”하며 그들은 모두 물질과 사랑에 대한 마음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정명석 목사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오. 주여! 내 소원은 저런 것이 아닙니다. 빈손으로 헌 누더기를 입고 가도 좋으니 이 목숨만 살아서 내 고향 월명동으로 가게 하옵소서. 월남 땅에 있는 한 나의 소원은 오직 내 목숨이 살아 부모 형제가 기다리고 있는 고국 땅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살아서 돌아간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하며 생명에 대한 애착심을 그렇게도 깊이 느낀 것은 정명석 목사 생애의 처음이었다. 정명석 목사는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며 하늘을 쳐다보고 심정이 뜨겁도록 기도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마음에 응답도 없었다. 순간 정명석 목사의 눈에는 눈물이 줄줄 작은 강처럼 흘러내렸다. ‘내가 살아서 돌아가기가 힘든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하늘 앞에 운명을 내맡기고 있는데, 그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정명석 목사는 또 기도했다. 제발 이 전쟁에서 임무를 다하고 살아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심정을 다해 기도했다. 그때 그의 가슴에 소리 없는 음성이 들렸다.

 “네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가치성을 진정으로 깨닫고 귀히 여기니, 내가 너를 정녕코 살아서 돌아가게 하리라. 나는 천하의 모든 생명을 주관하는 여호와니라.”

이것은 모든 사람이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 없는 깨달음의 응답이었다. 정명석 목사의 두 눈에서 다시 큰 강물 줄기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기쁨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결국, 정명석 목사는 재차 파월까지, 66년에서 69년까지 전쟁이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부모 형제가 기다리는 월명동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귀국을 앞두고 15일 동안은 정명석 목사의 마음이 참으로 설레었다. 다른 전우들도 TV와 녹음기, 전축, 냉장고를 챙기며 귀국 준비를 하고 고국의 품에 안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정명석 목사는 휴대용 녹음기 한 대도 사지 못했다. 사기도 힘들었고 작전하고 전투를 하다 보니 귀국 날짜가 다 되어 버렸다. 더구나 파월 직후 나트랑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나의 소원은 오직 살아만 가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전자제품에는 욕심이 없었다.


귀국이 가까워져 오니 정명석 목사의 마음 한 부분이 약간은 허전했다. ‘저것도 사서 가면 좋기는 좋지. 내 고향 두메산골에 전축 소리가 나고 TV 화면이 나오면 온 동네 사람이 다 모여들겠지.’라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전쟁터에서 살아서 돌아가게 되니 나트랑에서 기도할 때 이왕이면 생명도 구하고 물질도 구할 것을 그랬구나 하는 아쉬움이 조금씩 떠올랐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명석 목사는 계급의 위치상 큰 물건을 사서 갈 수도 없었고 거저 주어도 못 가져가게 되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물건이라도 하나 사서 가려고 달마다 모은 돈 300불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귀국 날이 가까워지자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환불하여 모두 고향으로 부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그런데 이틀 후 공문이 또 내려오기를 유공자 즉 훈장이 있는 사람만 큰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공적을 세우는 데는 무관심하고 물건만 욕심내어 사 나르던 사람들은 난리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자기가 애써 사놓은 대형 전자제품들을 유공자들에게 다 판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공자들의 숫자가 적으니 결국 그 비싼 물건들을 고물 팔 듯이 헐값에 팔 수밖에 없었다.


정명석 목사는 사병으로서 훈장이 여섯 개나 되는 유공자였다. 그때 같은 부대 소속이었던 모 하사가 사들인 물건들, TV와 녹음기를 싼값에 사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가끔 정명석 목사에게 TV와 녹음기를 보여 주면서 은근히 화를 돋우며 자랑을 하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정명석 목사를 사랑하사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셨다. 결국, 기도한 대로 생명도 무사히 돌아올 수가 있었고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신 하나님이었다. 이는 정명석 목사에게 정말 고마우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간증할 수밖에 없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귀국 후, 정명석 목사는 그 물건들을 다 팔아서 고향 석막리 교회를 짓는 데 썼다. 거기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이끄는 은신처로 삼다가 이제는 민족형을 넘어 세계형에 이르도록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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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