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석 목사_정명석 목사

정명석 목사와 베트남 전쟁 part.02



*이 글은 베트남 전쟁사를 다룬 실제 전투 기록들과 참전전우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연구,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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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한국군은 수많은 작전을 했다. 파월 기간 중 실시한 대대급 이상 대(大) 부대 작전만 1175회에 이르고, 2개 사단 이상의 대(大)병력이 참가하는 군단급 작전도 총 4회 실시됐다. 군단급 작전은 보통 한두 달 이상 야전에서 계속 긴장하며 싸워야 하기에 모두가 힘들어하는 작전이다.

정명석 총재는 파월 기간 중 남들이 한 번 겪기도 힘든 군단급 작전에 두 번이나 참전했다. 그가 참가했던 작전은 군단급 작전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오작교 작전'과 '홍길동 작전'이었는데, 두 번의 대작전에서 총재는 여느 장병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전공을 세웠다. 오작교 작전에서는 민간인을 괴롭히던 수십 명의 베트콩을 소탕하게 했고, 홍길동 작전에서는 엄청난 양의 무기를 노획하여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 최고의 전공을 세웠다. 이번 편에서는 정명석 총재가 홍길동 작전에서 전공을 세운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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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 작전은 1967년 3월 8일부터 5월 31일까지 베트남 중부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1번 도로가 지나는 지역에서, 남과 북으로 나뉘어 각각 적과 싸우던 맹호부대(수도사단)와 백마부대(사단)가 서로 연결하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한국군은 뚜이호아를 비롯한 남베트남 중부 해안 지역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적과 싸울 수 있었고, 한국군의 작전 지역 또한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1번 도로가 지나가는 중부 해안 지역은 베트콩"에게도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중요한 지역이었기에 북베트남 정규군까지 투입된 적은 한국군을 끊임없이 공격해 왔다. 이에 주월 한국군사령부는 적이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 게 지역 내의 베트콩을 모두 소탕할 작전을 계획하고, 오작교 작전에 이어 맹호부대와 백마부대가 모두 참가하는 군단급 규모 작전인 홍길동 작전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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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작전은 1967년 7월 9일부터 8월 26일까지 진행됐는데, 백마부대는 뚜이호아 서쪽의 산악 지역인 선호아 일대에서 북베트남 5사단 예하 부대 및 베트콩과 싸우게 되었다. '홍길동'이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한국군은 신속하고 재빠르게 기동하여 적을 소탕하는 작전을 하려고 했지만, 한국군의 작전을 눈치챈 적군은 작전지대를 미리 벗어나 피신하고 동굴에 은거하다가 기습하는 등 무더위 속에 지친 한국군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더구나 선호아 일대는 험준하고 수목이 우거진 정글 지대에 바위까지 군데군데 많아서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힘든 지역이었다. 그래서 총재가 속한 백마부대 28 연대 기동타격부대인 3중대도 소대별로 흩어져 적을 찾는 수색작전을 실시했으나, 5일 동안 적의 그림자도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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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6일째 되는 7월 14일에 적이 은거지로 이용한 듯한 동굴 지대를 발견하고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실시했다. 당시 3중대 1소대장으로 홍길동 작전에 참가한 최희남 소위는 그날따라 적을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소대원들에게 식사를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미리 전투태세를 갖춘 1소대는 첨병을 앞세워 세밀하게 수색하다가 동굴 지대에서 은거하던 적을 먼저 발견하고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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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원들이 적을 향해 치열하게 사격하는 전투 현장에서 정명석 총재는 침착하게 적이 은거했던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총재가 사용하는 무기인 M79 유탄발사기는 공용화기로 가까운 거리에서는 사용할 수 없고, 200~300m의 거리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라서 암석 지대에서 아군과 뒤엉켜 싸우고 있는 적들에게는 사격할 수 없었다. 더구나 총알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근접 전투에서는 머뭇거리다 오히려 피해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적이 은거하고 있던 동굴로 들어가 남아 있는 적은 없는지 천천히 수색하던 총재는 구석에 숨어 있던 적을 먼저 발견하고 유탄발사기를 적에게 겨누면서 항복하라고 말했다. 처음에 살기 어린 눈으로 총재에게 총구를 겨누며 대항하던 적병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 총재의 눈에서 적의가 없음을 확인하고, 결국 총을 내리고 만다. 만약에 적이 끝까지 총재에게 대항했다면,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할 수 없는 총을 가진 총재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적군의 생명까지 사랑하여,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고자 했던 총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적군이 순순히 잡히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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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맹렬하게 싸우던 전투가 모두 끝나고 확인해 보니 한국군은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날의 작전을 기록한 《전투상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대대는 오전 중 접적이 없이 계속 수색 중 14:15에 3중대가 동굴에서 30명을 사살하고 57미리 무반동총 1정, 82미리 박격포 1문(이하 생략), 포로 1명과 많은 통신 기재를 포획하여 홍길동 작전 기간 중 최대의 전과를 획득하였다.


D+5(7월 14일)

1대대는 오전 중 접적이 없이 계속 수색 중 14:15에 3중대가 동굴에서 30명을 사살하고 57미리 무반동총 1정, 82미리 박격포 1(이하생략).....포로 1명과 많은 통신기재를 포획하여 홍길동 작전 기간 중 최대의 전과를 획득하였다.


백마부대는 대대급 이상 대부대 작전만 474회를 실시했기에 전투상 보는 통상 연대급 이상의 작전이나 대대급 작전 중에서도 특이할 만한 작전 위주로 작성됐으며, 실제 전투상보에 기록된 백마부대의 작 전은 수십 개에 불과하다.


그런데 홍길동 작전 중 특별히 28 연대 1대대 3중대의 전과를 자세히 소개하며 '홍길동 작전 기간 중 최대의 전과를 획득하였다'라고 기록한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당시 3중대 1소대가 기습하여 무찌른 부대가 북베트남 정규군인 95 연대 본부였고, 연대 본부가 궤멸되면서 홍길동 작전은 대성공을 거뒀기에 3중대가 이 작전에 참가한 맹호부대와 백마부대의 약 80개 중대 중에서 최고의 전과를 세웠다고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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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작전에서 3중대의 전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총재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잡은 포로가 놀랄 만한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 이 작전으로 백마부대가 잡은 포로가 30명인데, 여느 포로와는 다르게 총재가 잡은 포로에 대해서는 당시 중대장인 민찬기 대위의 증언과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의 회고록인 <베트남 전쟁과 나>에 '중대 1소 대에서 포로를 1명 생포했다.'라고 특별히 기록돼 있다. 한국군이 수많은 작전에서 잡은 포로가 많은데, 어떤 의미 가 있어서 주월 한국군사령관은 그의 회고록에서 홍길동 작전을 회상하며 총재가 생포한 포로에 대해 기록했을까?

 

당시 3중대 1소대가 기습한 적은 북베트남 정규군인 95 연대 본부였으며, 총재가 잡은 포로는 일반 전투원이 아닌 연대본부의 정보병이었다. 결국 그의 진술에 의해 무기고로 쓰이던 동굴에서 수많은 무기를 발견한 것이다. 당시 동굴은 거미줄같이 사방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포로의 진술이 아니었으면 무기고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3중대는 그날 작전이 일단락된 이후에 포로의 진술을 토대로 다시 동굴을 정밀하게 수색하여 무기고를 발견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한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기록에 의하면 '동굴 속에서 엄청난 양의 무기를 꺼냈는데, 박격포, 기관총, 소총 등 자그마치 두 트럭 분량이었다.’라고 한다. 총재가 잡은 포로의 진술로 3중대가 엄청난 양의 무기를 노획한 것은 파월 기간 중 한국군이 세운 최고의 전과이기에, 그가 포로를 생포한 내용이 각종 전쟁 자료에 특별히 기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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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은 작전이 끝나고 적군의 무기를 노획하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베트콩의 무기를 많이 노획하면 자연스럽게 베트콩의 전투력이 약해질 것으로 생각하여 부대별로 무기 획득 게시판을 만들 정도로 무기 획득을 장려했다. 당시 1대대를 지휘했던 이영우 대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총재가 잡은 포로의 진술로 획득한 소총은 980정으로, 한 개 중대가 작전하여 얻은 것으로는 너무 엄청난 양이었다. 그래서 실제 전과로 기록할 때는 다른 부대의 사기도 고려해 전공을 나누어 주라고 상관이 지시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베트콩은 무기가 열악해서 1인당 1 정의 무기를 갖지 못하고 2~4명이 1 정의 총을 가지고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980 정의 무기는 베트콩 2000~4000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 더구나 북베트남의 정규 군인 95 연대는 베트콩보다 전투력이 훨씬 더 막강했기에 그들이 가진 총기 1정으로 한국군 3~5명에게 피해를 가 할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결국 총재가 목숨을 걸고 포로를 생포하여 무기를 노획하고, 이를 적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한 것은 한국군 수천 명을 살린 것과 같은 엄청난 전공이었다. 실제로 홍길동 작전에서 대패한 북베트남 95연대는 지리멸렬되어 분산되고 무기도 한국군에게 모두 뺏겨서 이후 몇 개월 동안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하니, 총재의 전공은 무기 획득도 엄청나지만 적에게 죽을 수도 있었던 수많은 한국군의 생명을 살리는 최고의 빛나는 전공으로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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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작전에서 3중대 1소대가 북베트남 95 연대 본부를 습격하여 대승리를 거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전 5일째 되는 밤, 저녁 식사를 하며 휴식을 취할 때 정글에서는 드물게 바람이 무척 거세게 불었다. 전장에서는 바람의 방향이 중요하다. 아군 편에서 적군이 있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면 아군의 대화나 소음, 냄새 등이 적에게 전달되어 위치가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바람이 적군 쪽에서 아군 방향으로 불면, 아군이 적군에게 발견될 위험이 적어지고, 적군의 위치도 쉽게 알게 된다. 다행히 이날은 적군 쪽에서 1소대가 머문 곳으로 매우 강한 바람이 밤새도록 불었다.


다음 날 적군을 발견한 1소대는 불과 50m 앞에 적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만약에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었거나 혹은 바람이 안 붙었다면 1소대가 작전을 하고 있다는 정황이 적에게 노출되어 크게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통상 정글에서는 수목이 우거져서 강한 바람이 자주 불지 않는데, 이날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바람을 사역자로 삼으셔서 적군과 가까운 거리에서 휴식하고 있던 1소대가 적에게 발견되지 않게 보호하셨기에, 1소대는 다음 날 기습적으로 적의 연대본부를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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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석 총재는 베트남 전쟁 기간 중 적을 향해 총을 쏘지 않고 늘 적을 살리려고 애썼다." 군에 입대하기 전 10대 때부터 대둔산에서 기도하며 성경을 수없이 읽으면서 '생명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그의 철학으로 삼고 끝까지 실천하였기에 먼저 총을 쏘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전쟁터에서도 적을 측은히 여겨 생포할 수 있었다. 홍길동 작전은 한국군이 실시한 여러 작전 중에서 최고로 성공한 작전이라고 평가받는다. 생사가 오가는 작전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시하여 실천한 총재는 다른 군인과 마주쳤다면 죽을 수도 있었던 적군을 포로로 잡아, 그의 생명을 살렸다. 또 총재가 생포한 포로의 진술에 의해 획득한 980정의 무기는 베트남 전쟁 기간 중 최고의 전공이며, 이로 인해 수많은 한국군의 피해를 미연에 방지한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표적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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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