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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발 쓴 것 같아! by 펜끝 이천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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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머리가 좀... 가발 쓴 것 같아. 트리트먼트라도 좀 해야겠어!”  

교회 본당 앞에서 후배가 나를 보고 말한다. 웃는 얼굴로 끄떡였지만 내심 기분 나빴다. 피부숍 원장도 헤어 디자이너도 내 머리카락은 백만 불짜리라고 부러워하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 말의 핵심은 나의 헤어스타일이 보기 좋지 않다는 거다. 예배 시간 내내 그녀의 말에 매여 목사님 설교는 귓등으로 날아갔다. 예배 후 만나서 씁쓸함을 전할까 말까 망설이다 그녀를 불렀다.

“ㅇㅇ아! 말을 안 하려다가 해. 사람을 보고 외모로 평가하는 것이 불편해.” “그랬구나. 언니~ 나도 아까 말하고 나서 좀 꺼림직했어요.” 여기서 끝냈으면 좋았을걸. 한 걸음 나간 말을 내가 해버렸다. “남자가 여자 외모를 평가하는 것만이 나쁜 것이 아니야. 아이들에게 외모 칭찬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하는 것이라 바람직하지 않다는 연구가 있어. 너에게 관련 책을 한 권 선물해야 할까 보다.” 앗, 그녀의 심정을 건드린 말이다. “언니! 그렇게 피곤하게 살지 말아!”

혹 떼려다 혹 붙인 꼴. 외모 평가하지 말라는 내 말이 그녀를 오히려 불쾌하게 만든 가치판단의 말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 후배는 나에게 말조심은 하겠지만 그녀와 심리적 거리감이 생겨 서먹서먹할 것 같다. 헤어지고 나서 계속 찜찜했다. ‘평소 나를 보면 눈으로 외모 스캐닝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어. 제대로 말한 거야’와 ‘그냥 참고 지나갔어야지’ 하는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녀의 말처럼 일상적인 외모 언급인데 내가 예민하게 반응했나? 사실은 외모 비난 투의 말에 마음이 상했던 거다.

한 주간 내내 이 사건을 깨 씹었다. <<비스킷>>속 잘 부서지는 과자 특성과 연결해 상처 입기 쉬운 나를 돌아봤다. 인정받고 싶으나 튀는 것이 싫어 존재감을 상실하는 아이와 동일시하면서. ‘하찮은 것에 집중하다 보면 신경증이 된다’는 새벽 말씀도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인간 관계성에 대한 시들에 꽂혔다. 에드윈 마크햄의 <원>에서 더 큰 원으로 품어내지 못하는 나를 반성하고. 데이비드 하킨스 <그는 떠났다>를 읽으며 같은 사건도 다르게 볼 수 있었다. 후배와의 사건을 긍정적으로 보면 되는데 여전히 그녀의 외모 언급에 속상해하는 내가 있다. 쇼크를 통해 더 좋은 것을 얻었다고 말하는 단계로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탓 내 탓으로 뇌 속에서 실랑이를 벌이며 일주일을 보낸 오늘 아침, 뇌과학 유튜브 영상 하나가 그동안의 성가심을 풀어줬다.

“칭찬은 힘이 세다, 그런데 비난은 그보다 더 힘세다.” 딘 버렛의 <<뇌 이야기>>에 실린 말이었다. 신경학적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칭찬보다 비난에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은 코르티솔 작용 때문이다. 코르티솔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자기 보호를 하려는 우리 뇌는 분명한 목표가 있고, 사회적 자기 보호를 하려는 동기가 있다. 사회적 평가가 타인의 호감을 얻으려는 목표를 방해하여 코르티솔을 분비한다.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에 반한 비난의 말은 뇌가 예민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 만났던 사람들이 “예뻐요.”라고 한 말은 모두 휘발되고 후배가 지적한 버스럭 머리카락에 기분 상한 것만 남았다.

뇌신경학적 메커니즘 덕분에 마음 밭을 깊이 갈았다. 가발로 촉발된 상념에 사로잡혀 나를 자세히 살펴보며 보낸 날들이다. 시인들의 삶에는 결핍으로 삶을 돌아보고 쓴 글이 많은데 2주 동안 부정적 표현에 부딪혀서 나를 되돌아봤다. 후배가 나의 머리카락을 언급한 것은 그녀에겐 사실 표현이었지만 나는 비난조의 평가로 들었다. 습관적 인사로 넘기지 못하고 그녀의 반응에 붙잡혀 보름을 씩씩거린 나를 보니 웃음이 난다. 가발 발언 후 따른 뒤숭숭한 일들을 마무리하면서 나에게 한마디 하자면,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칭찬은 맘껏 퍼부어 주고, 타인의 시선 감옥에 나를 가두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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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9/26